외환위기 사례 - 94년 데킬라위기 직전의 멕시코
1988년 살리나스가 멕시코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멕시코는 경제 면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정책적 전환을 맞이했다. 이미 그 이전 정권 때부터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무역자유화를 추구해왔던 멕시코는, 살리나스의 주도 하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혁정책을 폈다.
살리나스의 경제정책은 두 가지 큰 틀에서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외채 지급불이행의 해결이었다. 80년대 중남미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대외채무 불이행에 대해, 전직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브래디는 선진국들의 채권회수를 가능하게 하려면 라틴아메리카의 채무를 조정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때 채권의 액면가와 원리금 지급조건을 보다 장기로 조정한 소위 '브래디 채권'으로 기존 채무를 대체시켜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때마침 저축대부조합 사태로 궁지에 몰린 미국 정부는 대선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멕시코의 채무조정 요구에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임했고, 멕시코는 상당액의 달러 채무를 훨씬 낮은 액면가의 '브래디 채권'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브래디채권으로 인해 멕시코가 얻게 된 채무면제이익은 의미 있는 금액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오랜 기간 채무이행 거부를 주장해온 멕시코 내부의 여론이 외국 은행가들의 채무조정을 보고 진정되기 시작하였고, 외채문제가 멕시코 내부의 정치적 이슈에서 벗어나면서 외국 투자자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전환을 마련해 주었다. 브래디와의 거래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멕시코에는 다시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살리나스는 여기에 더하여, 90년 NAFTA를 제안하였다. 이미 미국과 캐나다가 쌍무간 무역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살리나스의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전 정권들의 무역자유화로 인해 이미 멕시코의 대외교역은 상당부분 자유무역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부 자유무역 반대자들이 주장하듯이 NAFTA 체결이 멕시코 경제에 충격적인 변화를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역시 심리적 전환점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수입상품 개방과 외국인투자 유치를 멕시코 내부의 정치적 모토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리나스는 국제조약으로써 명확하게 재확인한 셈이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살리나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NAFTA가 체결되고 이로써 멕시코는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받고 더불어 자국시장에 대한 미국투자자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하였다. 멕시코 내에서 국영기업 매각, 수입제한 철폐, 외자 유치 등이 속속 진행되면서 멕시코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93년 한 해 동안 멕시코에는 300억 달러 이상의 외국 자본이 유입되었다.
1993년 말에 중남미는 견실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이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새로운 자유주의적 경제환경이 라틴아메리카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는 믿음이 투자자들과 중남미 관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단지 몇 명의 경제학자들이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연 환율이 적정한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도 그렇지만, 멕시코는 살리나스의 집권기간 동안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 80년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끝냈다. 그러나 살인적인 초인플레가 중단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경제성장, 외자유입, 통화량 증대에 따라 여전히 물가상승세는 높은 편이었다. 91년부터 93년 까지 미국의 CPI가 6% 상승하는 동안 멕시코는 20%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보였다. 멕시코의 상품은 국외에서 비싸게 거래되었고, 외견상 안정되어 보이는 환율에도 불구하고 몇몇 경제학자들은 멕시코의 통화가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교역수지 역시 마찬가지 의문을 품게 했다. 90년대 들어 멕시코의 수출증가율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었는데 이는 통화강세로 인해 수출가격경쟁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무역자유화의 결과로 수입은 크게 늘었다. 93년 멕시코의 무역수지 적자는 GDP의 8%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멕시코의 관료들은 무역수지가 적자인 만큼 자본수지에서 그에 상응하는 흑자가 나고 있으며, 즉 멕시코가 외자 유치에 성공하여 외국투자자들이 멕시코에 투자하는 대가로 무역적자가 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멕시코 정부의 예산이 비교적 균형이 잡혀 있으며 오히려 외환보유고를 안정적으로 쌓아두고 있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멕시코의 경제성장이 80년대보다 나아지기는 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했고 외국으로부터 민간자본이 쏟아들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성장율은 80년대보다는 확실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인구증가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일부 학자들이 무성장(no growth)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멕시코의 경제성장은 기대 이하였다.
거대한 자본의 유입규모에 비해 GDP성장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일부 경제학자들은 페소화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통화 강세 때문에 멕시코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멕시코가 페소화를 평가절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NAFTA가 미국 의회의 비준을 두고 난관에 봉착해 있던 시점이라 멕시코 관료들은 통화가치에 관한 지적을 일축하였다.
93년 NAFTA가 미 의회의 비준을 받고 나자 멕시코의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살리나스의 후계자 세디요는 대선기간 내내, 상대후보의 정책이 80년대에 경험한 것과 같은 금융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국 선거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디요의 주장과 달리 멕시코에는 다시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94년 대선과정을 거치며 외환보유고가 꾸준히 유출되자 멕시코 당국도 문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멕시코는 이자율을 올리는 대신 페소화를 평가절하하는 쪽을 택했다. 90년대 초반 외자유입이 활발했음에도 저성장에 그쳤던 산업경기가 이미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자율을 올리는 것은 자칫 내수시장의 붕괴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다.
멕시코는 달러대비 페소화를 15%절하하였다. 하지만 이는 멕시코 정부가 경제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위험요인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다. 평가절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외환시장에는 추가적인 평가절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고, 15%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 페소화 하락에 대한 베팅이 지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페소화의 가치는 위기 이전의 50%수준으로 급락했다.
멕시코의 개혁은 통화가치의 폭락과 함께 파국을 맞았다. 시장에 멕시코 경제에 관한 불안심리가 확산되자 외국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브래디 플랜 이후 형성되었던 멕시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단기채무의 롤오버가 중단되었다. 또, 멕시코 정부가 페소화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할 거라는 의지를 담보하기 위해 시장에 풀어놓았던 테소보노스tesobonos(달러연동 채무)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페소가 폭락하면서 상환해야할 달러표시 채무가 급증한 것이다. 금융위기는 공황 상태가 되어 실물경제로 번졌다. 95년 멕시코의 GDP는 7% 감소하였고 제조업 생산은 15% 감소하였다. 이는 82년의 외환위기 때보다 더 극심한 후퇴였다.
95년 멕시코의 페소 평가절하로 시작된 중남미의 경제공황을 테킬라 위기tequilla crisis라고 한다. 멕시코는 90년대 들어 맞이한 호황기에 통화가치의 과대평가를 묵인함으로써 자국의 성장을 갉아먹고 급기야는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애초에 페소화 하락에 대해 투기가 횡행하였을 때 신속하게 신용통화를 축소하였다면 위기가 확대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좀더 과감하게 페소를 평가절하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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