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은 데킬라 위기에 관한 여러 기고문에서
멕시코가 정책적 오류를 범했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큰 경제적 재앙을 겪었다는 논지를 자주 보여준다.
이는 기예르모 칼보가 자주 문제제기하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금융위기가 임박한 상황에서 멕시코의 정책적 선택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으며,
사후적으로 정책 오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95년의 경제적 재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외국인투자자들의 자기실현적 공황 메커니즘이
멕시코의 실물경제에 까지 부담을 초래하였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신흥경제국들 또는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입장에서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투자자들에 관해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후에 어느 나라에서 다시 데킬라위기나 97년 동아시아 위기, 혹은 2001년 아르헨 위기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해도
투자자들의 자제 내지 통제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금융위기에 임박한 각 정부들의 정책 선택을 사후적으로라도 살펴보는 것이
개도국들의 입장에서는 의의가 있다.

크루그먼이 지적한 멕시코의 정책 오류는 크게,
페소화의 과도한 고평가를 허용한 일,
페소화 투기 사태가 일어났을 때 신용을 축소하지 않고 확대한 일,
페소화 평가절하를 서투르게 진행하여 투자자들의 실망감을 유발한 일 등이다.

여기서 과도한 고평가를 허용한 것은
데킬라위기 직전의 잘 나가던 멕시코 경제상황과 관련이 깊다.
이는 97년 동아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이것은 집권세력의 정치적 동기에서 묵인되는 경향이 있다.
국가경제의 기초체력에 대한 거품이 외환시장에서 형성되었던 셈인데,
수출호조, 내수호조 등 경제지표들은 지속적으로 높은 성장을 보이는데 반해 
금융시스템과 산업구조의 개선, 역내 자본의 축적, 법제 등의 개혁이 제대로 병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해당 국가경제에 대한 높은 평가에 사실은 버블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자국통화에 대한 투기가 집중될 때 신용을 축소하는 것은 참 쉬운 말이나
국내 실물경기의 극적인 침체를 유발하게 된다.
이것은 외환위기 때 한국 국내 상황을 떠올려보면 될 듯.
극단적인 고금리정책과 이윤율이 저하된 부실기업들의 과감한 퇴출..
거기에 자산가격이 급 저평가되면서 외국 자본들에 의한 잠식까지..
외환위기를 넘기기 위한 신용축소가
그야말로 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한국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평가절하와 관련된 얘기는 변동환율제를 택하고 있으면 해당 없으니 제외.
어쨌든 결론은 상당히 정치적인 쪽으로 흐르게 된다.
요컨대, 국가경제의 지표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 지속적 고성장을 기록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다.
경제성장을 이루면 그만큼 다양한 개혁과 구조개선이 병행되어야 하며
특히 여러 사회시스템에 비효율성이 내재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은
개도국들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적절한 정치적 선택, 정책적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개별 소비자나 가계(이는 정치적으로는 개별 유권자가 된다) 입장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적절한 정책선택과 의제설정에 추동력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럴헤저드moral hazard는 원래 보험업계 용어이다. 화재보험이 발달하던 초창기에 보험사들은 이상한 경향을 발견하였다. 손실에 대비해 건물이나 주택 등에 보험을 들어 놓은 가입자가 전소 화재를 당하는 경향이 높다는 통계였다. 특히 주변 여건의 변화로 건물의 예상 시장가치가 보험금보다 낮아질 때 이런 경향이 심했다. 심지어 일부 지주들은, 유령회사를 설립하여 실제 가치보다 부풀린 가격으로 건물을 사들이고 그 가격을 기준으로 보험에 가입한 다음, 곧바로 화재를 당하여 실제 건물 가치보다 높은 보험금을 타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모럴헤저드라는 말은, 만약 어떤 일이 잘못될 경우, 그 부담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해 놓고 자신은 일정 수준의 리스크만 감수하기로 결정한 상황을 뜻하게 되었다.

자금 차입은 본질적으로 모럴헤저드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돈을 대규모로 빌릴 수 있다면, 그 자금을 운용하여 큰 손실을 입는다 하더라도 차입자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다. 파산을 선언하면 발을 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규모 차입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차입자는 투자행위를 함에 있어 고도의 위험선호 경향을 갖게 된다. 즉, 고위험 고수익의 투자의사결정을 한다. 이런 경향은 차입자에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이자율을 부담시킨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대부자들은 차입자에게 자금을 대출하면서 그 사용을 놓고 일정한 제약조건을 내건다. 때로는 차입자로 하여금 투자안의 상당부분을 자기자본으로 충당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대부자는 발생가능한 모럴헤저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차입자에게 일정한 부담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부의 원칙이 깨어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이 마진콜 조건을 충족시켜 강제매도를 통해 추가하락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바로 그렇다. 유동화증권들의 거래에 있어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 바로 현재의 금융위기를 촉발시켰다. 하지만 시장에서 벌어지는 가격기구의 왜곡 이외에도, 모럴헤저드가 시장을 왜곡시키는 좀 더 광범위하고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차입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납세자들의 세금을 담보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일본이나 한국의 대기업집단에는 주거래은행이 자금조달을 담당한다. 이 은행들에 돈을 맡긴 일반 예금주들은 정부가 은행 뒤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예금이 안전하다고 믿는다. 국가가 예금보증을 명문화하지 않는 곳도 많지만, 그 중 어느 나라의 정부도 서민층의 예금을 부실은행이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것을 방관하기 어렵다. 이는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가만히 있을 정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온정주의는 정부와 국가에 관한 사상적 논의를 차치하고라도 당연한 것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침수지역에 여전히 집을 짓는다. 돈을 어디에 보관할 것이지에 대해서는 그보다도 더 조심하지 않는다. 

이런 부주의가 기업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된다. 예를 들어 은행을 하나 세운다고 하자. 허용가능한 선에서 높은 이자를 제시하거나 경품행사를 통해 예금을 끌어모은다. 끌어모은 돈을 다시 고리로 대출한다. 이 돈을 차입하는 이들은 웬만한 리스크는 기꺼이 감수하는 투기꾼이다. 예금주들은 예금이 보호받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투자의 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제 결과만 남는다. 투자가 성공하면 은행을 세운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털고 나오면 그만이다. 실패의 뒤처리는 정부가 맡는다.

이런 식으로 세금이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 관료들은 은행들에게 많은 제약을 부과해 왔다. 앞에서 대부자들이 차입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체적으로는 은행이 예금주들의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두어 과도한 리스크 감수를 방지하기도 하고,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두었으며, 은행업 허가를 통해 은행 간의 경쟁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시켜 왔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은행들은 안전한 대신 보수적이었고 또 그만큼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이내 규제철폐 목소리의 주요 비판대상이 되었고, 개혁론자들은 각 은행들이 알아서 돈을 빌려주게 하고 더 많은 신규진입자들이 자본시장에 들어와 예금 유치를 놓고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경쟁과 자유를 확대하는데 따르는 위험은 간과되었다. 규제철폐로 은행들이 지나친 리스크까지 감수할 자유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은행업 허가의 특혜적 가치가 작아지면서 은행들이 안전하게 예금을 운용해야 할 당위성도 옅어졌다. 때마침 기업금융 분야에 등장한 다양한 대안적 자금조달방식들은 전통적 은행가들의 이윤을 잠식해나갔다. 더욱이 80년대에는 모럴헤저드가 마치 유행병처럼 전세계로 번져나갔다. 여기에 제대로 대처한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 역시 저축대부조합의 문제를 잘못 처리하였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특히나 정부가 보증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까닭에 느슨해진 금융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일본의 은행들은 다른 나라의 동업자들보다 차용자의 신용에 덜 신경 쓰고 더 많이 빌려주었으며, 결과적으로 거품경제를 기괴한 수준으로까지 부풀리는데 큰 몫을 했다.      




일본경제는 1953년부터 1973년까지 놀라울 정도의 고성장을 이루었다. 이 20여년을 지나면서 농업이 주요산업이었던 일본은 세계 최대의 산업국으로 변모하였고 철강과 자동차의 최대 수출국이 되었다. 경제지표 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7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일본경제의 성공 비결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70년대 이후 일본 경제의 고성장세는 둔화되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성장률은 미국 등 여타 선진국들보다 높았다.

일본경제의 성공 원인에 관한 분석은 크게 두 줄기를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는 일본의 고성장을 훌륭한 기초경제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탁월한 교육수준과 높은 저축률 등 국민경제의 기초 환경을 이루는 여건들이 주로 거론되었다. 이 견해는 어떻게 일본이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비용으로 고부가가치 상품들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뒷받침하는 논리였다.

또 하나의 분석은 일본이 기존 선진국들이 구축하고 있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상당히 다른, 근본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개발해냈다는 견해였다. 일본의 자본주의가 여타 선진국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정부의 관리감독'과 '게이레쓰'(일본 특유의 선단식 기업집단, 한국의 재벌과 유사)가 주로 거론되었다.

일본 정부는 50년대와 60년대의 고성장 기간 동안 강력한 지도와 기획을 통해 국가경제의 발전방향을 주도했다. 통산성과 재무성으로 대표되는 일본 정부는, 특히 수입제한과 수입 면허에 기업 대출을 연계시켜 특정 산업과 특정 기업들을 집중 육성, 이들로 하여금 수출위주의 고도성장을 이끌게 하였다.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정부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정부 주도의 경향은 이후로도 유지되었다.

또한, 일본식 기업집단형태인 게이레쓰는, 주거래은행을 중심으로 기업집단을 구성하고 그 주거래은행을 통하여 간접금융 위주로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계열사들로 하여금 단기 자금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계열사간 상호출자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함으로써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에 있어 단기 수익성을 추구하는 대신 장기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은행 예금을 보장함으로써 단기 수익성의 저하에 따른 은행 부실에도 불구하고 뱅크런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런 여건 하에서 일본 정부는 성장동력으로 삼을 만한 산업들을 전략적으로 설정하고, 대기업 집단들을 해당 산업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나서 전략 산업분야에 진출한 기업들이 기술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철저하게 보호정책을 폈다.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은 일단 수출전선에 나서게 되면 단기 수익성은 무시하고 시장점유율 확대에만 주력하였다. 이런 식으로 해당 산업의 국제적 지배력을 확실히 하고 나면 다음 성장 산업으로 초점을 이동하는 식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방식으로 철강, 자동차, 가전, 반도체 등의 주요 고부가가치 산업들을 정복했다.     








1988년 살리나스가 멕시코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멕시코는 경제 면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정책적 전환을 맞이했다. 이미 그 이전 정권 때부터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무역자유화를 추구해왔던 멕시코는, 살리나스의 주도 하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혁정책을 폈다.

살리나스의 경제정책은 두 가지 큰 틀에서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외채 지급불이행의 해결이었다. 80년대 중남미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대외채무 불이행에 대해, 전직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브래디는 선진국들의 채권회수를 가능하게 하려면 라틴아메리카의 채무를 조정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때 채권의 액면가와 원리금 지급조건을 보다 장기로 조정한 소위 '브래디 채권'으로 기존 채무를 대체시켜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때마침 저축대부조합 사태로 궁지에 몰린 미국 정부는 대선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멕시코의 채무조정 요구에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임했고, 멕시코는 상당액의 달러 채무를 훨씬 낮은 액면가의 '브래디 채권'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브래디채권으로 인해 멕시코가 얻게 된 채무면제이익은 의미 있는 금액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오랜 기간 채무이행 거부를 주장해온 멕시코 내부의 여론이 외국 은행가들의 채무조정을 보고 진정되기 시작하였고, 외채문제가 멕시코 내부의 정치적 이슈에서 벗어나면서 외국 투자자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전환을 마련해 주었다. 브래디와의 거래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멕시코에는 다시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살리나스는 여기에 더하여, 90년 NAFTA를 제안하였다. 이미 미국과 캐나다가 쌍무간 무역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살리나스의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전 정권들의 무역자유화로 인해 이미 멕시코의 대외교역은 상당부분 자유무역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부 자유무역 반대자들이 주장하듯이 NAFTA 체결이 멕시코 경제에 충격적인 변화를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역시 심리적 전환점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수입상품 개방과 외국인투자 유치를 멕시코 내부의 정치적 모토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리나스는 국제조약으로써 명확하게 재확인한 셈이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살리나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NAFTA가 체결되고 이로써 멕시코는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받고 더불어 자국시장에 대한 미국투자자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하였다. 멕시코 내에서 국영기업 매각, 수입제한 철폐, 외자 유치 등이 속속 진행되면서 멕시코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93년 한 해 동안 멕시코에는 300억 달러 이상의 외국 자본이 유입되었다. 

1993년 말에 중남미는 견실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이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새로운 자유주의적 경제환경이 라틴아메리카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는 믿음이 투자자들과 중남미 관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단지 몇 명의 경제학자들이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연 환율이 적정한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도 그렇지만, 멕시코는 살리나스의 집권기간 동안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 80년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끝냈다. 그러나 살인적인 초인플레가 중단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경제성장, 외자유입, 통화량 증대에 따라 여전히 물가상승세는 높은 편이었다. 91년부터 93년 까지 미국의 CPI가 6% 상승하는 동안 멕시코는 20%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보였다. 멕시코의 상품은 국외에서 비싸게 거래되었고, 외견상 안정되어 보이는 환율에도 불구하고 몇몇 경제학자들은 멕시코의 통화가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교역수지 역시 마찬가지 의문을 품게 했다. 90년대 들어 멕시코의 수출증가율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었는데 이는 통화강세로 인해 수출가격경쟁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무역자유화의 결과로 수입은 크게 늘었다. 93년 멕시코의 무역수지 적자는 GDP의 8%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멕시코의 관료들은 무역수지가 적자인 만큼 자본수지에서 그에 상응하는 흑자가 나고 있으며, 즉 멕시코가 외자 유치에 성공하여 외국투자자들이 멕시코에 투자하는 대가로 무역적자가 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멕시코 정부의 예산이 비교적 균형이 잡혀 있으며 오히려 외환보유고를 안정적으로 쌓아두고 있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멕시코의 경제성장이 80년대보다 나아지기는 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했고 외국으로부터 민간자본이 쏟아들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성장율은 80년대보다는 확실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인구증가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일부 학자들이 무성장(no growth)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멕시코의 경제성장은 기대 이하였다. 

거대한 자본의 유입규모에 비해 GDP성장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일부 경제학자들은 페소화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통화 강세 때문에 멕시코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멕시코가 페소화를 평가절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NAFTA가 미국 의회의 비준을 두고 난관에 봉착해 있던 시점이라 멕시코 관료들은 통화가치에 관한 지적을 일축하였다. 

93년 NAFTA가 미 의회의 비준을 받고 나자 멕시코의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살리나스의 후계자 세디요는 대선기간 내내, 상대후보의 정책이 80년대에 경험한 것과 같은 금융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국 선거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디요의 주장과 달리 멕시코에는 다시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94년 대선과정을 거치며 외환보유고가 꾸준히 유출되자 멕시코 당국도 문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멕시코는 이자율을 올리는 대신 페소화를 평가절하하는 쪽을 택했다. 90년대 초반 외자유입이 활발했음에도 저성장에 그쳤던 산업경기가 이미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자율을 올리는 것은 자칫 내수시장의 붕괴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다. 

멕시코는 달러대비 페소화를 15%절하하였다. 하지만 이는 멕시코 정부가 경제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위험요인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다. 평가절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외환시장에는 추가적인 평가절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고, 15%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 페소화 하락에 대한 베팅이 지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페소화의 가치는 위기 이전의 50%수준으로 급락했다.

멕시코의 개혁은 통화가치의 폭락과 함께 파국을 맞았다. 시장에 멕시코 경제에 관한 불안심리가 확산되자 외국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브래디 플랜 이후 형성되었던 멕시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단기채무의 롤오버가 중단되었다. 또, 멕시코 정부가 페소화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할 거라는 의지를 담보하기 위해 시장에 풀어놓았던 테소보노스tesobonos(달러연동 채무)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페소가 폭락하면서 상환해야할 달러표시 채무가 급증한 것이다. 금융위기는 공황 상태가 되어 실물경제로 번졌다. 95년 멕시코의 GDP는 7% 감소하였고 제조업 생산은 15% 감소하였다. 이는 82년의 외환위기 때보다 더 극심한 후퇴였다. 

95년 멕시코의 페소 평가절하로 시작된 중남미의 경제공황을 테킬라 위기tequilla crisis라고 한다. 멕시코는 90년대 들어 맞이한 호황기에 통화가치의 과대평가를 묵인함으로써 자국의 성장을 갉아먹고 급기야는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애초에 페소화 하락에 대해 투기가 횡행하였을 때 신속하게 신용통화를 축소하였다면 위기가 확대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좀더 과감하게 페소를 평가절하했어야 했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아르헨티나인처럼 부유하다"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당시 유럽의 투자자들에게는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가 마치 기회의 나라처럼 여겨졌다. 풍부한 자원이 기다리고 있던 아르헨티나는 유럽의 이민과 자본투자가 향하던 목적지였다. 적어도 1차대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는 국제사회에서 확고한 부국이었다. 가끔 화폐의 과다발행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져 곤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 시대에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특히 1930년대 들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때마침 20세기 초반 호경기때 차입했던 장기외채들의 상환시기가 몰리자 아르헨티나 역시 대공황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아르헨티나 경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페소화의 과감한 평가절하, 자본유출 통제, 외채 상환 유예 등을 통해 여타 선진국들보다 오히려 빠른 회복세를 보여줬다.

그런데 이 시기 택한 정책들은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의 비효율을 공고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외환에 대한 통제정책은 규제로 남아 기업의 인센티브를 제거하고 부패를 야기하였다. 일시적인 수입 제한 조치가 상당한 기간 동안 무역장벽으로 변모하여 극도로 비효율적인 자국 기업들이 내수시장을 횡행하도록 보호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국영기업들은 그 고용창출효과에도 불구하고 제 기능을 하는데 실패했다. 적자가 급증하였고,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82년 포클랜드 전쟁 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라울 알폰신의 민간정부가 경제회생을 약속하며 집권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다른 중남미 국가들이 그러하였듯 아르헨티나에도 외채위기가 찾아왔다. 통화개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효과 없이 끝나고 89년까지 아르헨티나는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89년 대선에서 카를로스 메넴이 승리하고, 도밍고 까바요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까바요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다른 산업분야에 보조금을 주기 위해 농산물 수출에 과중하게 관세를 매기고 있었는데 까바요는 이 악습을 끝내고자 했다. 또한,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던 공공부문의 민영화도 추진되었다. 까바요의 개혁정책들은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가 우울했던 만큼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까바요의 정책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통화정책의 개혁이었다. 고질적으로 반복되어왔던 인플레이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는 통화위원회currency board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과거 유럽 식민지 시대에 독자적인 통화 발행이 허용되었던 식민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통화시스템으로, 식민지 통화를 본국 통화 가치에 엄격히 고정시키기 위해 그 안정성을 경화(hard currency, 금처럼 각국의 통화와 늘 교환이 가능한 화폐) 보유고로 완벽하게 뒷받침할 것을 강제하였다.

즉 식민지 영토에서 독자적으로 발행한 통화의 가치가 본국의 통화 가치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현지에서 통화를 발행할 때 경화보유고를 의무적으로 확보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식민지 거주민들은 현지에서 발행된 통화를 법률이 정하는 고정환율로 본국통화, 즉 파운드나 프랑으로 바꿀 권리를 보장받았고, 현지 중앙은행은 모든 현지 통화를 바꾸어줄 수 있을 정도의 본국 통화를 의무적으로 확보하여야 했다.

통화위원회 제도는 2차대전 후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적극적인 통화정책이 강조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바요가 통화위원회를 도입한 것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대외 신용 회복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알폰신이 도입하였던 통화인 아우스트랄Austral은 다시 페소로 환원되었고, 통용되는 페소는 모두 달러보유고의 뒷받침을 통해 1페소당 1달러의 고정환율을 적용받았다. 즉, 통화위원회를 채택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누군가 달러를 페소로 바꾸지 않는 한 화폐를 발행할 수 없도록 스스로의 발권력을 제한한 것이다.

통화위원회 제도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물가상승률은 0에 가까울 정도로 하락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멕시코의 브래디 채권과 유사한 정책을 놓고 채권국들과 협상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자본유입이 재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실물경제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GDP는 불과 3년 만에 25%가 성장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 95년 초 멕시코로부터 촉발된 소위 '데킬라 위기'는 여타 중남미 국가들로 전파되면서 특히 아르헨티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통화위원회 제도를 두고 페소화의 신용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아르헨티나는, 페소화에 대한 투매 앞에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멕시코로부터 시작된 패닉 심리가 외국투자자들로 하여금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투매하도록 몰았고 이런 현상이 시작되자 통화위원회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통용되고 있던 페소는 달러보유고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항상 페소화의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정상이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일시에 갑자기 대량의 페소화를 달러로 바꾸려 들자 은행들이 먼저 파산하면서 실물경제도 다시 후퇴하였다.

일단, 멕시코의 대외부채로부터 비롯된 외국 투자자들의 불안심리가 롤오버 중단, 채무상환 요구 등의 형태로 대출액을 감소시키기 시작하자, 채무자인 아르헨티나 국내 기업들은 자국의 은행 계좌에서 페소화를 인출하여 이를 다시 달러로 바꾸어 대외 채무를 상환하였다. 이때 중앙은행은 충분한 달러보유고가 있으므로 환전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페소화를 인출해준 자국 은행들은 현금보유고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일시에 일어나자 아르헨티나 국내 은행들은 자신들의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하고 이는 다시 기업들에게 페소 현금을 확보하도록 강요하였다. 마치 1930~31년 미국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이 신용위기와 은행파산의 악순환이 나타나, 은행시스템이 신용통화를 창출하는 과정과 정확하게 반대 방향으로 시중의 신용을 축소시킨 것이다. 이 축소의 끝에는 일반 예금주들의 뱅크런이 기다리고 있었다. 97년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통화위원회 시스템은 오히려 정부의 손발을 묶어두는 셈이 되었다. 원래 신용의 축소가 일어날 것에 대비해 현대의 금융시스템은 정부의 예금 보장, 중앙은행의 발권력 등 여러 보루를 마련해 놓는다. 그러나 한번 불안심리가 증폭되기 시작하자 정부와 중앙은행의 역할은 생각처럼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예금주들은 페소화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었지만, 달러 대비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외로부터 신용이 축소되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페소자산을 달러로 바꾸어두고자 했다. 이러한 심리의 기저에는 불안정한 경제사적 경험도 일조하였을 것이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너도나도 달러를 보유하고자 한 것이 은행들의 붕괴를 촉진시킨 셈이다. 

예금주들이 달러를 보유하고자 달려들기 시작하자 중앙은행의 발권력은 신기루로 전락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 통화위원회 제도의 한계가 드러났다. 달러와 바꾸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은행들의 붕괴를 눈 앞에 두고서도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낼 수 없었다. 물론, 발권력에 제한이 없었다 하더라도 대외부채가 문제인 상황에서 페소 발행으로 은행들을 구한다는 것은 다시금 엄청난 통화가치 하락을 용인하는 셈이 될 것이었다. 결국 통화위원회 하에서든 변동환율제에서든 대외 채무의 일시적인 상환압력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