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의 성공 원인 개관
일본경제는 1953년부터 1973년까지 놀라울 정도의 고성장을 이루었다. 이 20여년을 지나면서 농업이 주요산업이었던 일본은 세계 최대의 산업국으로 변모하였고 철강과 자동차의 최대 수출국이 되었다. 경제지표 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7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일본경제의 성공 비결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70년대 이후 일본 경제의 고성장세는 둔화되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성장률은 미국 등 여타 선진국들보다 높았다.
일본경제의 성공 원인에 관한 분석은 크게 두 줄기를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는 일본의 고성장을 훌륭한 기초경제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탁월한 교육수준과 높은 저축률 등 국민경제의 기초 환경을 이루는 여건들이 주로 거론되었다. 이 견해는 어떻게 일본이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비용으로 고부가가치 상품들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뒷받침하는 논리였다.
또 하나의 분석은 일본이 기존 선진국들이 구축하고 있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상당히 다른, 근본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개발해냈다는 견해였다. 일본의 자본주의가 여타 선진국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정부의 관리감독'과 '게이레쓰'(일본 특유의 선단식 기업집단, 한국의 재벌과 유사)가 주로 거론되었다.
일본 정부는 50년대와 60년대의 고성장 기간 동안 강력한 지도와 기획을 통해 국가경제의 발전방향을 주도했다. 통산성과 재무성으로 대표되는 일본 정부는, 특히 수입제한과 수입 면허에 기업 대출을 연계시켜 특정 산업과 특정 기업들을 집중 육성, 이들로 하여금 수출위주의 고도성장을 이끌게 하였다.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정부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정부 주도의 경향은 이후로도 유지되었다.
또한, 일본식 기업집단형태인 게이레쓰는, 주거래은행을 중심으로 기업집단을 구성하고 그 주거래은행을 통하여 간접금융 위주로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계열사들로 하여금 단기 자금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계열사간 상호출자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함으로써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에 있어 단기 수익성을 추구하는 대신 장기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은행 예금을 보장함으로써 단기 수익성의 저하에 따른 은행 부실에도 불구하고 뱅크런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런 여건 하에서 일본 정부는 성장동력으로 삼을 만한 산업들을 전략적으로 설정하고, 대기업 집단들을 해당 산업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나서 전략 산업분야에 진출한 기업들이 기술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철저하게 보호정책을 폈다.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은 일단 수출전선에 나서게 되면 단기 수익성은 무시하고 시장점유율 확대에만 주력하였다. 이런 식으로 해당 산업의 국제적 지배력을 확실히 하고 나면 다음 성장 산업으로 초점을 이동하는 식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방식으로 철강, 자동차, 가전, 반도체 등의 주요 고부가가치 산업들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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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증법 paradeigma
예증법이란 잘 알려진 예를 근거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논증.
예증법에서는 제시된 예가 논증의 전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예증법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추론(귀납법을 의미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는 추론(연역법을 이름)도 아니다. 그것은 부분과 부분이 유사성을 가지고 있고 그중 하나가 잘 알려진 것일 때,
그 잘 알려진 한 부분에서 다른 한 부분으로 진행하는 추론"이라 하였다.
예증법의 설득력은 그 예가 얼마나 적절한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다양한 상식과 사례들이 필수적이다.
토피카는 그래서 중요하다.
다양한 주제의 고사성어, 격언, 史實, 이론과 학설, 통계자료 등은
모두 예증법의 훌륭한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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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사례 - 94년 데킬라위기 직전의 멕시코
1988년 살리나스가 멕시코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멕시코는 경제 면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정책적 전환을 맞이했다. 이미 그 이전 정권 때부터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무역자유화를 추구해왔던 멕시코는, 살리나스의 주도 하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혁정책을 폈다.
살리나스의 경제정책은 두 가지 큰 틀에서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외채 지급불이행의 해결이었다. 80년대 중남미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대외채무 불이행에 대해, 전직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브래디는 선진국들의 채권회수를 가능하게 하려면 라틴아메리카의 채무를 조정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때 채권의 액면가와 원리금 지급조건을 보다 장기로 조정한 소위 '브래디 채권'으로 기존 채무를 대체시켜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때마침 저축대부조합 사태로 궁지에 몰린 미국 정부는 대선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멕시코의 채무조정 요구에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임했고, 멕시코는 상당액의 달러 채무를 훨씬 낮은 액면가의 '브래디 채권'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브래디채권으로 인해 멕시코가 얻게 된 채무면제이익은 의미 있는 금액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오랜 기간 채무이행 거부를 주장해온 멕시코 내부의 여론이 외국 은행가들의 채무조정을 보고 진정되기 시작하였고, 외채문제가 멕시코 내부의 정치적 이슈에서 벗어나면서 외국 투자자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전환을 마련해 주었다. 브래디와의 거래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멕시코에는 다시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살리나스는 여기에 더하여, 90년 NAFTA를 제안하였다. 이미 미국과 캐나다가 쌍무간 무역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살리나스의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전 정권들의 무역자유화로 인해 이미 멕시코의 대외교역은 상당부분 자유무역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부 자유무역 반대자들이 주장하듯이 NAFTA 체결이 멕시코 경제에 충격적인 변화를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역시 심리적 전환점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수입상품 개방과 외국인투자 유치를 멕시코 내부의 정치적 모토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리나스는 국제조약으로써 명확하게 재확인한 셈이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살리나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NAFTA가 체결되고 이로써 멕시코는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받고 더불어 자국시장에 대한 미국투자자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하였다. 멕시코 내에서 국영기업 매각, 수입제한 철폐, 외자 유치 등이 속속 진행되면서 멕시코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93년 한 해 동안 멕시코에는 300억 달러 이상의 외국 자본이 유입되었다.
1993년 말에 중남미는 견실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이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새로운 자유주의적 경제환경이 라틴아메리카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는 믿음이 투자자들과 중남미 관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단지 몇 명의 경제학자들이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연 환율이 적정한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도 그렇지만, 멕시코는 살리나스의 집권기간 동안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 80년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끝냈다. 그러나 살인적인 초인플레가 중단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경제성장, 외자유입, 통화량 증대에 따라 여전히 물가상승세는 높은 편이었다. 91년부터 93년 까지 미국의 CPI가 6% 상승하는 동안 멕시코는 20%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보였다. 멕시코의 상품은 국외에서 비싸게 거래되었고, 외견상 안정되어 보이는 환율에도 불구하고 몇몇 경제학자들은 멕시코의 통화가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교역수지 역시 마찬가지 의문을 품게 했다. 90년대 들어 멕시코의 수출증가율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었는데 이는 통화강세로 인해 수출가격경쟁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무역자유화의 결과로 수입은 크게 늘었다. 93년 멕시코의 무역수지 적자는 GDP의 8%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멕시코의 관료들은 무역수지가 적자인 만큼 자본수지에서 그에 상응하는 흑자가 나고 있으며, 즉 멕시코가 외자 유치에 성공하여 외국투자자들이 멕시코에 투자하는 대가로 무역적자가 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멕시코 정부의 예산이 비교적 균형이 잡혀 있으며 오히려 외환보유고를 안정적으로 쌓아두고 있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멕시코의 경제성장이 80년대보다 나아지기는 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했고 외국으로부터 민간자본이 쏟아들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성장율은 80년대보다는 확실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인구증가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일부 학자들이 무성장(no growth)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멕시코의 경제성장은 기대 이하였다.
거대한 자본의 유입규모에 비해 GDP성장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일부 경제학자들은 페소화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통화 강세 때문에 멕시코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멕시코가 페소화를 평가절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NAFTA가 미국 의회의 비준을 두고 난관에 봉착해 있던 시점이라 멕시코 관료들은 통화가치에 관한 지적을 일축하였다.
93년 NAFTA가 미 의회의 비준을 받고 나자 멕시코의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살리나스의 후계자 세디요는 대선기간 내내, 상대후보의 정책이 80년대에 경험한 것과 같은 금융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국 선거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디요의 주장과 달리 멕시코에는 다시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94년 대선과정을 거치며 외환보유고가 꾸준히 유출되자 멕시코 당국도 문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멕시코는 이자율을 올리는 대신 페소화를 평가절하하는 쪽을 택했다. 90년대 초반 외자유입이 활발했음에도 저성장에 그쳤던 산업경기가 이미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자율을 올리는 것은 자칫 내수시장의 붕괴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다.
멕시코는 달러대비 페소화를 15%절하하였다. 하지만 이는 멕시코 정부가 경제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위험요인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다. 평가절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외환시장에는 추가적인 평가절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고, 15%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 페소화 하락에 대한 베팅이 지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페소화의 가치는 위기 이전의 50%수준으로 급락했다.
멕시코의 개혁은 통화가치의 폭락과 함께 파국을 맞았다. 시장에 멕시코 경제에 관한 불안심리가 확산되자 외국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브래디 플랜 이후 형성되었던 멕시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단기채무의 롤오버가 중단되었다. 또, 멕시코 정부가 페소화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할 거라는 의지를 담보하기 위해 시장에 풀어놓았던 테소보노스tesobonos(달러연동 채무)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페소가 폭락하면서 상환해야할 달러표시 채무가 급증한 것이다. 금융위기는 공황 상태가 되어 실물경제로 번졌다. 95년 멕시코의 GDP는 7% 감소하였고 제조업 생산은 15% 감소하였다. 이는 82년의 외환위기 때보다 더 극심한 후퇴였다.
95년 멕시코의 페소 평가절하로 시작된 중남미의 경제공황을 테킬라 위기tequilla crisis라고 한다. 멕시코는 90년대 들어 맞이한 호황기에 통화가치의 과대평가를 묵인함으로써 자국의 성장을 갉아먹고 급기야는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애초에 페소화 하락에 대해 투기가 횡행하였을 때 신속하게 신용통화를 축소하였다면 위기가 확대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좀더 과감하게 페소를 평가절하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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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금융위기와 통화위원회 제도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아르헨티나인처럼 부유하다"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당시 유럽의 투자자들에게는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가 마치 기회의 나라처럼 여겨졌다. 풍부한 자원이 기다리고 있던 아르헨티나는 유럽의 이민과 자본투자가 향하던 목적지였다. 적어도 1차대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는 국제사회에서 확고한 부국이었다. 가끔 화폐의 과다발행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져 곤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 시대에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특히 1930년대 들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때마침 20세기 초반 호경기때 차입했던 장기외채들의 상환시기가 몰리자 아르헨티나 역시 대공황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아르헨티나 경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페소화의 과감한 평가절하, 자본유출 통제, 외채 상환 유예 등을 통해 여타 선진국들보다 오히려 빠른 회복세를 보여줬다.
그런데 이 시기 택한 정책들은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의 비효율을 공고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외환에 대한 통제정책은 규제로 남아 기업의 인센티브를 제거하고 부패를 야기하였다. 일시적인 수입 제한 조치가 상당한 기간 동안 무역장벽으로 변모하여 극도로 비효율적인 자국 기업들이 내수시장을 횡행하도록 보호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국영기업들은 그 고용창출효과에도 불구하고 제 기능을 하는데 실패했다. 적자가 급증하였고,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82년 포클랜드 전쟁 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라울 알폰신의 민간정부가 경제회생을 약속하며 집권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다른 중남미 국가들이 그러하였듯 아르헨티나에도 외채위기가 찾아왔다. 통화개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효과 없이 끝나고 89년까지 아르헨티나는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89년 대선에서 카를로스 메넴이 승리하고, 도밍고 까바요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까바요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다른 산업분야에 보조금을 주기 위해 농산물 수출에 과중하게 관세를 매기고 있었는데 까바요는 이 악습을 끝내고자 했다. 또한,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던 공공부문의 민영화도 추진되었다. 까바요의 개혁정책들은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가 우울했던 만큼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까바요의 정책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통화정책의 개혁이었다. 고질적으로 반복되어왔던 인플레이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는 통화위원회currency board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과거 유럽 식민지 시대에 독자적인 통화 발행이 허용되었던 식민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통화시스템으로, 식민지 통화를 본국 통화 가치에 엄격히 고정시키기 위해 그 안정성을 경화(hard currency, 금처럼 각국의 통화와 늘 교환이 가능한 화폐) 보유고로 완벽하게 뒷받침할 것을 강제하였다.
즉 식민지 영토에서 독자적으로 발행한 통화의 가치가 본국의 통화 가치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현지에서 통화를 발행할 때 경화보유고를 의무적으로 확보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식민지 거주민들은 현지에서 발행된 통화를 법률이 정하는 고정환율로 본국통화, 즉 파운드나 프랑으로 바꿀 권리를 보장받았고, 현지 중앙은행은 모든 현지 통화를 바꾸어줄 수 있을 정도의 본국 통화를 의무적으로 확보하여야 했다.
통화위원회 제도는 2차대전 후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적극적인 통화정책이 강조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바요가 통화위원회를 도입한 것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대외 신용 회복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알폰신이 도입하였던 통화인 아우스트랄Austral은 다시 페소로 환원되었고, 통용되는 페소는 모두 달러보유고의 뒷받침을 통해 1페소당 1달러의 고정환율을 적용받았다. 즉, 통화위원회를 채택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누군가 달러를 페소로 바꾸지 않는 한 화폐를 발행할 수 없도록 스스로의 발권력을 제한한 것이다.
통화위원회 제도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물가상승률은 0에 가까울 정도로 하락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멕시코의 브래디 채권과 유사한 정책을 놓고 채권국들과 협상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자본유입이 재개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실물경제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GDP는 불과 3년 만에 25%가 성장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 95년 초 멕시코로부터 촉발된 소위 '데킬라 위기'는 여타 중남미 국가들로 전파되면서 특히 아르헨티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통화위원회 제도를 두고 페소화의 신용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아르헨티나는, 페소화에 대한 투매 앞에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멕시코로부터 시작된 패닉 심리가 외국투자자들로 하여금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투매하도록 몰았고 이런 현상이 시작되자 통화위원회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통용되고 있던 페소는 달러보유고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항상 페소화의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정상이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일시에 갑자기 대량의 페소화를 달러로 바꾸려 들자 은행들이 먼저 파산하면서 실물경제도 다시 후퇴하였다.
일단, 멕시코의 대외부채로부터 비롯된 외국 투자자들의 불안심리가 롤오버 중단, 채무상환 요구 등의 형태로 대출액을 감소시키기 시작하자, 채무자인 아르헨티나 국내 기업들은 자국의 은행 계좌에서 페소화를 인출하여 이를 다시 달러로 바꾸어 대외 채무를 상환하였다. 이때 중앙은행은 충분한 달러보유고가 있으므로 환전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페소화를 인출해준 자국 은행들은 현금보유고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일시에 일어나자 아르헨티나 국내 은행들은 자신들의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하고 이는 다시 기업들에게 페소 현금을 확보하도록 강요하였다. 마치 1930~31년 미국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이 신용위기와 은행파산의 악순환이 나타나, 은행시스템이 신용통화를 창출하는 과정과 정확하게 반대 방향으로 시중의 신용을 축소시킨 것이다. 이 축소의 끝에는 일반 예금주들의 뱅크런이 기다리고 있었다. 97년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통화위원회 시스템은 오히려 정부의 손발을 묶어두는 셈이 되었다. 원래 신용의 축소가 일어날 것에 대비해 현대의 금융시스템은 정부의 예금 보장, 중앙은행의 발권력 등 여러 보루를 마련해 놓는다. 그러나 한번 불안심리가 증폭되기 시작하자 정부와 중앙은행의 역할은 생각처럼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예금주들은 페소화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었지만, 달러 대비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외로부터 신용이 축소되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페소자산을 달러로 바꾸어두고자 했다. 이러한 심리의 기저에는 불안정한 경제사적 경험도 일조하였을 것이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너도나도 달러를 보유하고자 한 것이 은행들의 붕괴를 촉진시킨 셈이다.
예금주들이 달러를 보유하고자 달려들기 시작하자 중앙은행의 발권력은 신기루로 전락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 통화위원회 제도의 한계가 드러났다. 달러와 바꾸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은행들의 붕괴를 눈 앞에 두고서도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낼 수 없었다. 물론, 발권력에 제한이 없었다 하더라도 대외부채가 문제인 상황에서 페소 발행으로 은행들을 구한다는 것은 다시금 엄청난 통화가치 하락을 용인하는 셈이 될 것이었다. 결국 통화위원회 하에서든 변동환율제에서든 대외 채무의 일시적인 상환압력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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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과 논증
논리학 분야의 개념들은 영어로 표현하는 편이 되려 이해하기 편한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 추론이란, 무언가를 근거로 하여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는 특수한 종류의 사고를 말한다. 이렇게 표현해놓고 보면 딱딱하지만 추론이 inference임을 상기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낫다. 추리통계에서 샘플로부터 모집단의 파라미터를 추정하는 것이 바로 'infer'였다. 이와 같이 어떤 대상을 근거로 하여 다른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사고의 흐름이 바로 추론이다. 이때 추론의 출발점을 '전제premise'라고 하고, 추론의 도착점을 '결론conclusion'이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쉴새없이 추론을 한다. 친구의 표정을 보고 '저 녀석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생각을 하고, 출근길 동료의 인사 목소리에서 사무실 분위기를 가늠한다. 심지어는 가십뉴스를 보면서도 때때로 추론에 가까운 사고를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고 끝내는 게 아니라, 말이나 글과 같이 나 이외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게 되면 '논증'이 된다. 즉, 전제를 근거로 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을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이 '논증argument'이다.
논증은 추론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자연언어논증natural argument'과 '형식논증formal argument'으로 구분된다. 자연언어논증은 비형식논증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로 표현된 논증을 말한다. 반면에 형식논증은 p,q,r, 화살표 같은 일련의 기호들로 표시되는 논증이다. 그래서 형식논증은 기호논리학이라고도 한다.
일상적 언어로 이루어진 자연언어논증을 접하다 보면 형식적으로는 논증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으면서 내용상으로는 논증인 경우가 있다. 이를 '실천적 논증'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우리가 은연중에 사용하는 말과 주장 대화 중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외견상 논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논증이 아닌 주장들, 즉 전제가 결론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주장들을 '오류 논증' 또는 '오류fallacy'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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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란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정열이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경우에 진리란 실천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묵상(默想)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살고 있다.
사상의 단순화와 실천적 진리에 대한 헌신이 결합되면,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봉기시킬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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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구의 원칙 gag rule
Stephen Holmes가 주장한 개념.
매디슨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견해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인 논리이다.
정치적 갈등이 지나치게 치열할 때 민주주의는 위험에 놓이기 때문에,
정치적 토의와 행위를 저해하고 갈등 유발을 증폭시키는 이슈들은
정치적 사안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원만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논리.
이에 따르면, 사회적 갈등을 지나치게 유발하는 이슈들은
정치적 협상과 선거경쟁의 의제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양극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갈등을 떼법으로 지칭하여 비판하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함구의 규칙은 단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존속에 기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갈등 표출을 제약함으로써 체제 경직화를 유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체제에 더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리가 사회질서 유지에 기여함으로써
갈등대립 유보에 적극적으로 차용되는 것은,
그러한 유보가 정책결정권자들이나 의제설정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책환경을 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구체적 정치현실에 있어서,
불리한 이슈를 일단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로 작용한다.
cf) 현실정치에서는 위와 같은 개념과는 약간 다른 의미로 gag rule 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주로 미국과 같은 양당 위주의 입법과정에서 두 주요정당의 협상으로 특정 정책 내지 입법안이 결정될 때, 합의된 입법안을 그 이외의 정치적 쟁점들과 결부시키지 말 것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with gag rule'이라는 표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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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교섭단체
현행 국회법상 어느 정당이든 원내교섭단체가 구성되어야 의정활동에서 정책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
원내교섭단체 여부에 따라 의정활동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데,
일단 원내교섭단체가 되면 국고보조가 크게 늘어난다.
예컨대 국고보조금의 50%를 교섭단체 수로 나누어 우선적으로 지급받는 것은 물론,
정책입법에 필수적인 정책연구위원을 국고보조로 둘 수 있고,
여기에 수십억 단위의 입법지원비까지 받게 된다.
단지 국고보조금 배정 뿐만이 아니다.
원내교섭단체는 국회운영의 실질적인 핵심단위로
윤리심사요구, 의사일정 변경동의, 국무위원 출석요구, 의안 수정동의, 긴급현안질문, 본회의 및 위원회에서의 발언시간 및 발언자 수, 상임위 및 특별위 의원선임 등에 있어서도 권한을 갖는다.
외국의 경우 영국, 미국, 호주, 독일 상원 등은 교섭단체 구성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으며,
교섭단체를 두는 경우에는 의원정수의 3~5% 이내로 정하고 있다.
외국의 교섭단체 구성요건
국가 의원정수 구성요건
프 랑 스(하원) 577명 의원 30인이상(5%)
독 일(하원) 622명 재적의원의 5%(31인)
이 태 리(하원) 630명 20인이상(3%)
스 페 인(하원) 350명 15인이상(4%)
일 본(중의원) 500명 2인이상
아르헨티나(하원) 257명 3인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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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된 이해
인민demos 다수의 결정이 공동체의 전체 이익을 위해 합리적 결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주지 못한다면
여러 다양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해 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정당성의 근거는 허약할 수 밖에 없다.
즉 공동선이 무엇인가를 더 잘 알고 그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갖는
여러 형태의 엘리트지배 체제에 대해 민주주의의 정당성이나 우월함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로버트 다알은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이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알은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기준을 먼저 제시하고
이어서 실제 민주주의의 제도와 요건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민주주의의 실제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의 장점이나 가치가 충분히 발현되기 어렵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알이 제시한 이상적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인상적인 것은 '계몽된 이해enlightened understanding'이다.
이 개념은 아무리 정치 참여의 자유와 투표의 평등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선호가 어떤 것인지 이성적으로 자각하고,
또 사안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투표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할 때
그릇된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이성적 자각 내지 판단'이란
자신의 선호에 대한 자각과 판단 뿐 아니라
개별 사안과 정책, 입법에 있어서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과 특히 경제적 이해를 위시한 제반 이해관계를
이성적으로 평가하고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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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데모스, 즉 인민은
직접 의회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법의 제정자이자 주권의 원천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인민의 참여와 에너지가 공익성의 실현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통제하였다.
그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정교했는가 하는 것은 당시 몇 가지 제도를 보면 곧 알 수 있다.
유티나이Euthynai는 행정관들이 임기가 끝날 때 자동으로 회계감사를 받아야 하는 제도로,
현직에 있을 때 부정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에이상게리아Eisangelia는 공직자, 특히 장군들에게 적용된 법으로
장군이 군사작전에서 실패했을 때 반역죄로 고발될 수 있는 엄혹한 제도이다.
그리고 매우 흥미 있는 제도는 그라페 파라노몬Graphe paranomon인데,
누군가가 어떤 법안을 제안해 그 발의가 민회를 통과해 법이 됐는데
그 법이 시행한 결과가 공동체에 해악을 끼쳤다고 할 때 그 법의 제안자를 사후에 고발할 수 있는 제도이다.
절차적으로 합법적이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결과가 나쁠 때 그 책임을 묻는 결과 책임의 원리이다.
최장집 어떤 민주주의인가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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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적 민주주의와 매디슨의 민주주의
민중적 민주주의 -> '민주주의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과 규범을 부여
매디슨적 민주주의 -> 민주주의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 ' the scheme of representation'
일반 대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 (투표로써..)
갈등하는 이들의 이익과 권리를 배제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통치체제로 통합하여
정치참여를 최대한 허용
동시에, 다수지배를 스스로 견제하는 체제
tyranny of majority 에 대한 '제도적' 배제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에 입각한 민중적 민주주의는
일상적 현실 내에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제약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적 민주주의는,
현실사회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이상과 가치에 대한 '사회적 상상'을 창출하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매디슨적 민주주의는 일상성 속에 운영가능하다는 점에서 설득력과 정당성을 갖는다.
민중적 민주주의가 달성하지 못하는 실현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디슨의 민주주의는 강점이 있다.
이러한 강점은 미국의 헌정사상과 대의제 민주주의로 구체화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매디슨의 민주주의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안정화와 일상성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가능케 하는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해주었지만
반면에 체제경직성의 문제를 내포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또, 다수지배를 견제하기 위한 대표제는
현실적으로 대중의 정치참여 경로를 경색시킴으로써
사회적 갈등이 실질적으로 대표될 기회를 축소시킨다.
결과적으로 엘리트집단과 기득권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소수 이익집단들에 국한되는 퇴영적 다원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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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주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빈자만을 위한, 빈자에 의한 지배체제이기 때문에 왜곡된 정치체제라고 규정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시민 전체를 의미하는 인민demos 스스로의 지배,
인민의 권력을 실현하는 체제로서가 아니라
빈자들이 집단 이익을 다수 지배의 방식으로 실현하는 체제로 이해했다.
플라톤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입장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플라톤은 사물에 대한 절대적으로 올바른 지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모든 개인의 의견이 평등한 가치를 갖고
그에 따라 다수 의견이 결정력을 갖는 집단적 의사결정방식을 수용할 수 없었다.
<국가>에서 그는, 공동체의 공공선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이상주의적인 견지에서,
특별히 교육받은 통치자집단, 즉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희생하면서라도 공공선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고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후견자들guardians이
공동체의 집단적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민주주의를 빈자들이 스스로 사회의 다수라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다수 지배의 결정방식으로 실현하는 체제라고 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사회 성원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만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의와 조화를 증진해서 일반 이익을 실현하고자 매진하는 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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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핵심가치와 고대 민주주의 (0) | 2009.03.18 |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와 고대 민주주의
현대 대의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와 질적으로 다른 제도적 실천적 내용을 갖고 있었음에도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란,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의 열정, 요구,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체제
혹은 그런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윤리적 기초는
정치과정과 정부의 통치행위가 보통 사람들의 의지와 권익 실현에 기여하고
또 거기에 기반을 두는, 그러한 정치 공동체를 지향하는데 있다고 본다.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공동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념의 매력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모델은 하나가 아니라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와 현대 대의민주주의, 두 개이다.
이 사실은 민주주의를 풍부하게 하는 결정적인 원천이다.
고대에 발전했던 직접민주주의와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인민 스스로의 통체 체제를 추구한다는 점,
그리고 정의 평등 자유 인간의 위엄이라는 핵심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치와 이념 측면에서 동일성을 갖는다.
또한 그리스 고전학자 조시아 오버가 말했듯이,
권위주의 등 다른 체제와 대별되는 핵심 덕목으로서 '자체수정능력revisability'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2,5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양 민주주의 모델은 이러한 가치와 덕목을 공유한다.
하지만 제도적 측면에서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대 대의제에서 실제의 통치자는 인민이 아니라 선출된 대표들이다.
이들은 자신을 선출해준 인민들에게 선거라는 느슨한 고리를 통해서만 책임질 뿐이다.
제도적 실천이 너무 다르기에 고대 민주주의의 제도는
현대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제도적 가능성을 둘러싼 현실적 배경의 문제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보다 거대한 사회와 복잡한 이슈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현대에 여전히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제도적 실천에 있어서는 이질적이지만 그 가치와 이념 등 핵심 내용에 있어서
고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보여준 민중민주주의의 원형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동일성이 유지된다라기보다
처음 아테네에서 실현된 민주주의가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동력이 되어 오늘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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